camino(스페인어로 길)는 다양한 길이 있다. 종착지는 모두 '산티아고'이지만, 유럽인에게는 자기 집에서 출발해 산티아고에 모두 도착할 수 있다.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도 가끔씩 카미노 마크인 노란 화살표를 발견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이야 1년을 쉬엄쉬엄 걸어 도착하고 싶지만.. 한국인들을 비롯해 가장 많은 사람이 가는 프랑스 길의 중간 기착지점인 St. Jean Pied de Port(생장 피에 드 포르)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북쪽길과 프랑스길 모두를 고민했지만,
초심자의 우려는 많은 이들이 걷는 길을 메뉴얼대로 걷는 안전한 길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전날 공항에서 미리 TGV 기차표를 받아 둔 채 잠들었고,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조금은 둘러보며 걷기 위해 제법 일찍 일어났다. 민박집 주인이 준 커피와 빵 그리고 사과로 아침을 때우고, 어젯밤에 무섭고 두렵게 보이던 그 골목길을 걸어간다.
이 길이 어제 그 길이 맞는가?
길은 항상 그대로인데 사람의 마음에 따라 너무나 달리 느껴진다...
파리에는 이미 벚꽃이 피고 있었다.. 가장 먼저 문을 여는 곳은 빵집이었고..
낯선 이방인들은 달랑 관광의 명소 Paris를 잠만 자고 빠져나가려 분주히 지하철로 향한다.
몽빠르나스역을 찾아가는 길. 역 근처 지하철역에서 내려 기차역을 찾아가기로 했다.. 큰 대로길은 나름 노천카페로 유명한 길이라지만 이른 아침이라 그다지 활기가 없다.
김여사는 나의 불어실력을 믿는 듯한 눈치이지만....나름 특목고 불어과 출신인데, 아무 말도 기억나지 않고, 알아 듣기도 힘들다. 그래도 탁월한 방향감각으로 몽빠르나스를 찾는다. 불어로 물어보다가, 결국 영어로 길을 물어 찾아간다. 제법 큰 건물이라 얼추 다왔다고 생각할 무렵 역 앞의 길에는 큰 장이 열려 있었다(샴푸를 가져가지 말라고 해서 비누로 머리를 감은 김여사는 이 때부터 머리 상태가 엉망이라고 내내 투덜거렸다)
서울에도 도심 한복판에 이런 장이 서면 좋으련만, 여기서 과일 몇 개와 치즈 그리고 크로와상을 사면서 너무나 흐믓했다..
7유로 조금 넘는 가격으로 기차에서 점심을 때운 것이지만, 그 맛난 크로와상을 조금 더 샀다면 다음 날 더 기분 좋았을 텐데.
기차표도 조금 일찍 예매한 덕에 일인당 30유로에 Bayonne을 경유해 생장까지 갈 수 있었다. 부산보다 먼 거리를 TGV를 타고 더 저렴하게 슈우웅~~!
10시 10분에 출발한 기차는 14시 55분에 바욘에 도착했고, 도착하자마자 건너 편 철로에는 작은 미니 기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기다리는 시간 없이 바로 생장으로 출발한다.
바욘에서 생장 가는 길도 프랑스 휴양지의 모습처럼 너무나 근사하고 이쁘다. 이 느릿느릿 진행하는 작은 기차는 1시간 20분을 달려 우리를 카미노의 출발 지점에 내려 놓아 주었다.
이 기차에는 몇몇 지역 주민을 제외하고는 4명의 순례자가 타고 있었지만, 수줍은 초심자는 내심 경계와 염려만으로 서로를 확인한 채 말없이 기차에서 내렸다. 베지테리안이었던 캐나다 여자 캐서린(그 무거워 보였던 가방을 들고 3일 뒤 팜플로냐에서 아픈 발로 인해 병원에 갔다는 이야기만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온 캔 와타나베상.
작은 마을이라 몇번 두리번 거린 후 바로 방향을 잡고 순례자사무실을 찾아간다.
맨 처음으로 본 카미노 마크지만 "뭐라 카노?" 하고는 그냥 방향만 따라간다.
오래된 마을답게 작은 성곽으로 둘러 쌓인 구시가 안에 순례자 사무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실 조금 일찍 왔으면 이 이쁘고 작은 마을도 요리조리 구경했을텐데. 아직은 정신이 없다. 설레고 어설프다(내 앞의 주황바지가 캐서린이다).
아직은 정규 시즌이 아니라 분주하지 않다. 4월부터 카미노의 인파는 급속하게 늘어난다. 순례자 사무실에서 크레덴시알(여행자 여권, 증명서)를 만들고 가리비 하나를 얻는다. 그리고 알베르게(숙소)의 요금을 지불하고, 간단한 안내를 듣는다.
이곳 생장에서 피레네를 넘어 론세스바예스를 가는 길은 길고 험난하다.
루트도 나폴레옹 루트와 발칼루스 루트 두 곳으로 나뉘어 걸을 수 있는데.. 나폴레옹 루트는 훨씬 험하지만 아름다운 절경을 선물한다. 하지만 사무실의 자원봉사자는 나폴레옹 루트에 눈이 아직 많고 중간에 쉬는 곳들도 모두 문을 닫았으니 발칼루스 루트로 가라고 한다.
가방을 택시 서비스로 보내고 맨몸으로 첫날은 오르려고 했지만, 이마저도 비수기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젠장 짤 없이 발칼루스 루트로 가야겠구나 생각하며 알았다고 했다. 대부분의 순례자도 그러겠노라며 대답한다(대답만~^^).
공식 알베르게로 향한다.
그리고는 방명록에 몇 자를 적어 넣었다. 그 전에 왔던 다른 한국인들.. 동양인은 무조건 한국인이라고 볼 만큼 카미노에는 한국인이 많다. 하지만 나는 걷는 길 내내 10명도 안 되는 한국인만을 보았다.
크레덴시알에 기록된 3월 12일, 가리비를 가방에 단 지금부터 나는 순례자다!
일단 알베르게에 가방을 내려놓고 마을 위에 성에 올라가 기념사진을 찍는다. 이 사진을 찍어준 친구가 캔 와타나베였고 35살의 일본인 친구와 서로 말도 안 되는 영어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 날 저녁은 낯설기도하고 일찍 자야 하는데다 음식을 줄이기 위해 우리가 가지고 간 햇반에 즉석 카레와 짜장 등으로 먹기로 했다. 달리 조리시설도 없고 전자렌지 정도가 전부다. 캔이 미안했던지 뭘 좀 사온다고 나가서는 무려 1시간을 헤매다 사온 도수 5% 사과 와인(개인적으로 탄산 주스 같았다)과 함께 먹었다. 후에 산책 겸 나가서 문 닫기 직전의 작은 가게에서 물과 말린 살구(말린 과일은 무게는 나가지만 비타민과 수분 섭취가 가능한 훌륭한 비상식이라 후에 상비)와 땅콩을 사가지고 들어왔다.
요 사진을 쑥스럽게 올린 이유는 내일 내가 올라갈 산이 바로 저 오른편의 눈과 구름이 쌓여 있는 피레네이기 때문이다.
알베르게 내 침대 옆 창 밖의 생장의 새벽 신시가 모습.. 공기는 정말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청량하다.
알베르게는 순례자용 숙소를 말한다. 보통 사설과 지자체 운영 그리고 협회 또는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이 있다. 가격은 4~10유로에 묶을 수 있다(일부는 도네이션으로 요금이 정해지지 않은 곳도 있다). 첫날 묶은 알베르게의 안주인은 불어 밖에 할 줄 모르셨는데, 내가 몇 개의 불어 단어를 하는 게 너무 신기하셨는지 금방 친해졌다. 내일의 일정 때문인지 9시 쯤 모두 잠자리에 들기 시작했다(카미노에선 보통 저녁 9시 30분이면 불을 끈다). 이 날은 누가 누군지 모른채 잠을 잤지만.. 이 날 이곳에는 함께 3~4일을 함께한 스페인, 이태리, 영국, 일본, 캐나다, 리투아니아 등의 친구들, 그리고 독일에서 온 패트릭 등 많은 친구들이 설레임 속에 2층 침대에 각자의 침낭을 펴고 잠을 잤다.
피곤은 낯설음 보다 강한 듯, 나도 그냥 잠자리에 곯아떨어졌다.
언제가 생장에서 천천히 이 설레임을 다시 경험하고 싶다. 카미노가 아니라 단지 관광객이어도 좋을 듯하다.
* 학교 그만두고 열흘의 시간 동안 너무 바빴다. 그 전에도 거의 2달을 교육에 마무리에 휴일이 없었는데 이제는 출근하는 게 더 편할 듯 싶을 정도였다. 거의 매일 5시간 정도 밖에 못 자다가 출발하는 날 새벽이 되서야 짐을 싸다 지쳐서 눈물 바람한 뒤 겨우 2시간 남짓 새우잠 자고 다시 아침에 배낭을 꾸린다. 배낭이 잠기지 않아 짐을 덜어냈는데도 여전히 들어올리기도 힘들다. 아버지가 이걸 들고 어떻게 가냐고 걱정하신다. 4년 전부터 가고 싶었던 곳이었고, 이곳에 오기 전에 49일 기도하고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해서 떠나려고 했는데, 일정도 뚠이 혼자 다 알아보고 나는 생장이 프랑스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르고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으로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 리무진을 타고서야 마음이 편했다. 될대로 되라. 그동안 일단 떠나면 그만이었던 경험을 믿어보자. 그런데 지금 생장에 도착해보니 짐을 보낼 수 없단다. 마음이 심란하다. 남들은 적어도 한 달 이상 체력 준비를 하고 온다는데 내 몸은 벌써 여기저기가 심상치 않다. 어떻게해야 되나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를 굴리다 멈춘다. 다른 거 다 버리고 이 터질 듯한 머리만이라도 비워내자며 떠난지 하루도 안 되서 걱정하는 내 자신이 바보 같았다. 일단 자고 내일 맘 가는대로 하자며 털고 일어나 알베르게로 내려간다. 그래도 자꾸 떠오른다. 침대에 눕는다. 기억이 없다. 그냥 곯아떨어졌나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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