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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no de Santiag

산티아고의 길 6 - 팜플로냐에서 우테르가까지(3월 16일, 18Km)

길을 걸을 때 가장 쉬운 방법은 앞사람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 보폭에 맞춰 나도 덩달아 빨라진다. 행여 잘못된 길을 갈 염려도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이 사라지면 내가 앞선 사람이 되고 멀리서 나를 따라오는 이들이 있다. 조금만 주춤되면 그들도 내 앞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목적지는 모두 같다. 사라진 게 아니라 그냥 내 앞과 뒤에서 같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팜플로냐 - 시수르메노르 - 사리키에기 - 페르돈봉 - 우테르가


이젠 아침에 일어나는 게 슬슬 무섭다. 2층에 주방(한 층 올라가는 것도 힘들다)이 있는 알베르게라 사람들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일어나자마자 올라가서 어제 사 놓은 빵과 커피로 아침을 먹는다. 꾸역꾸역 알베르게의 모든 사람들이 짐을 꾸리고 있다(대부분의 알베르게는 1박만 가능하고, 8시 이전에 모든 사람이 나가야 한다). 짐을 꾸리고 나가려니 비가 온다. 레인커버 씌우고 우비를 입고 걷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앞으로 간다. 이태리, 크로아티아 등에서 온 젊은 친구들이 한 무리이다. 찻길을 걸으려니 다른 곳에서 또 한 무리의 사람이 모여든다. 도심 속에 아침을 여는 사람들 옆으로 비옷이나 판초에 커다란 가방을 맨 사람들 십여 명이 우르르 줄을 지어 걷는다. 
원래 도심 속에서 노란 화살표를 찾아 길을 가는 것은 어렵지만, 무리지어 가는 사람들 틈에서 쉽게 도심을 빠져 나간다. 

출근을 하는 사람들은 신기하게 우리를 쳐다보고, 순례자 무리는 도시의 외곽에 있는 대학가를 끝으로 도시를 미끄러지 듯 빠져나간다. 세계 어디든 대학교의 아침, 등교하는 젊은 학생들은 이쁘다. 내가 휘파람을 불러대자 마르코가 웃는다.

농담하며 지나친 길은 순식간에 5킬로미터가 넘는다.

무리지어 걷다 보니 어느새 라라소나에 도착했다. 1시간여 만에 빠르게 도착해서 조금은 피곤해서 바에 들러 커피 한 잔하고 쉬어 가기로 했다. 그동안 바를 찾다가 고생한 걸 생각하면.. 넘 들르고 싶었다. 따스한 카페콘레체 한 잔에 가방 내려놓고 쉬고 나서 다시 길을 걷는다.

오늘 걷는 길은 790미터의 페르돈봉을 넘어 푸엔테레이나까지 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출발했다. 이미 1,450미터를 넘은 우리가 이까짓 790미터 봉우리 하나가 뭐가 힘들까 싶었지만... 비오는 진흙 길이 우리를 기다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라라소나의 이쁜 마을을 뒤로 걷다보니 초반에는 깔끔한 블럭이 깔린 길이다. 저 멀리 봉우리에서는 풍력발전기들이 부지런히 돌아간다. 요 길은 샤를마뉴의 기독교군대가 아이골란드무슬림 군대에게 패한 곳이란다. 뭔 이정표도 없고, 있어도 스페인어라 이런 이야기는 가이드북을 보고야 알 수 있었다. 좌우지간 여기 피가 엄청 뿌려진 곳이다.

우리가 걷는 사이 조금 전 가게에서 함께 간식거리를 샀던 자전거 순례를 하는 멕시코 커플이 지나간다. "부엔 카미노!"를 외치고 지나가는 그들을 보고는 조금은 샘이 난다. 아주 쌩쌩 달리겠구나....

생각 보다 길은 초반부터 길고 지루했다. 가까울 것 같았던 저 멀리 산 언덕은 좀처럼 가까워질 줄 모르고, 3일 간의 걷기에 체력은 많이 방전된 상태다. 이럴 때 필요한 건 걸그룹의 음악과 휴식이다.. 비가 오지만 길 가에 잠시 앉아 손이 시려워 헤어밴드에 스마트폰을 꽂아 놓고 음악 들으며 쉬고 있으니 개 한미리가 달려온다 (원래 난 개, 고양이 이런 거 무지 싫어한다. 아니 무서워한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서 개, 고양이 솔직히 정말 많이 만난다. 이건 무서워할 틈도 없이 크기별로 달려든다.. 쫄면 지는 거다.

앞으로 보이는 산은 안개인지 구름인지 뭔가가 계속 무럭무럭 올라오고, 길은 계속해서 돌과 진흙 투성이다. 위의 마을 가는 포장된 길도 있을텐데.. 뭐하려고 이 길로 이 산을 오르나 싶지만.. 길의 화살표는 이 길을 따라 계속 나를 가라고 한다.
아 ~ 영양갱이나 마이쮸라도 있으면 조금 힘을 내겠구만.. 비가 와서 걸그룹 음악을 듣기도 점점 힘들다...


사리키에기 마을 근처에 다다르자 순례자의 무덤과 작은 의자가 있다. 멀리 팜플로냐의 전경과 내가 넘은 피레네 산맥이 들어오지만..다 귀찮다.. 후딱 여길 넘어야 하는데 다리도 아프고 힘들다. 걸으면서 밟은 돌들이 발목의 통증을 더 심하게 만든다.
벤치에서 쉬고 있자니 멀리서부터 꾸역꾸역 할아버지 두 명이 올라온다. 부엔 카미노를 외치자 어느 나라 사람이냔다. 한국사람이라니 한국사람을 많이 만났단다. 자기는 4번째 카미노길이라고.. 그런데 뒤따라 올라 온 친구분은 6번째란다... 허걱!
난 뭐냐? 첫 번째 4일차에 이미 퍼질 것 같은데.. ㅜㅜ

한참을 쉬다 다시 올라간다. 윗마을에는 바가 있을 꺼라는 희망을 품고..

물론 윗마을에는 바가 없다.. 11시가 다 돼 도착한 사리키에기, 이쁜 마을이다. 마을 한가운데 마을회관 같은 곳 처마 밑에서 빵과 과일을 꺼내 점심을 먹는다. 바람 때문에 먹는 것도 힘들다. 그냥 거지들이 잠시 젖은 옷 좀 털고 젖은 빵 몇 개를 먹는 거다.

아직 노상방뇨가 힘든 김여사는 다행히 마을회관 들어가는 아줌마에게 화장실을 부탁해 문제를 해결한다.
페르돈 고개를 올라가야 되는데 출발하기가 싫다.. 오늘은 정말 컨디션이 영 아니다.

경사도 높은 오르막에 진흙의 양이 장난이 아니다. 진흙은 옷을 더럽혀서 문제가 아니라, 신발의 무게를 몇 배로 만든다. 발목 무게의 하중은 어깨 위의 짐의 무게로 전이된다. 입에서 별별 욕이 나와야 하는데, 김여사 때문에 씨익~~ 씨익~~되며 그냥 꾸역꾸역 걷는다.

페르돈 고개는 이름 그대로 나에게 좀 미안하다고 해야 한다. 저 위에 멋진 상징물에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ㅜㅜ  

올라가다 보니 아까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던 멕시코 커플이 끙끙거리고 있다. 가까이가서 보니 진흙이 자전거의 틈을 완전히 틀어막아 바퀴조차 굴러가지 않는다. '여길 왜 저걸 끌고 와' 이런 생각과 '아까 쌩 가더니 ㅋㅋ'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런데 야들 상태가 영 아니다. 자전거 두 대가 전진도 후진도 못할 상태로 보인다. 우리 뒤로 누가 더 올 꺼 같지도 않고. 같이 진흙을 좀 떼주고 있자니.. 물도 없어 보인다. 우리 물 한 통 건네주고(모자랄 것 같지만 얘들은 물이 하나도 없다), 그냥 지나쳐 일단 우리 목적지로 오르려고 했다.

잠시 오르다 보니 밑으로 내려갈 샛길이 눈에 들어온다. 그냥 내가 맨가방을 던지고.. 다시 내려가서 도와주기로 했다. 다시 내려가기도 힘든 상태에서 한 100미터만 전진하면 될듯해 보여서.. 길이 있으니 날 따라 오라며, 자전거를 내 어깨에 지어 매고 100미터를 올라갔다. 남자 아이는 가방을 들고 옮기면서.. 고맙다고 한다.
힘들어 죽겠는데.. 내가 온몸에 진흙 뒤집어 쓰면서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하지만 그 아이들에게는 내가 얼마나 고마웠을까..ㅎㅎ 
멕시코 친구들에게 일단 페르돈고개 올라가서 상태가 양호하면 싸인을 줄테니 올라오라고 하고서 일단 고개를 올라간다.


페르돈에 올라섰다. 여행기와 가이드북 블로그에서 보던 순례자의 모습을 담은 상징물이 눈 앞에 펼쳐진다. 사진을 찍기 전에 멕시코 친구들에게 이 윗길의 상황을 먼저 수신호로 알려줬다. 풍력 발전기 관리를 위한 찻길이 길게 늘어져 있기에 올라오라고 했다. 수신호를 이해 못한 친구가 직접 올라와 상황을 보고 내려간다.
자 ~~ 이제는 인증샷이다.. 하지만 바람 많이 불고 힘들어서 대충 몇 컷 찍고 이제 가이드북에서조차 조심하라는 내리막을 본다. 짜증이 지대로다. 온통 돌투성이다. 돌! 돌! 돌!

멀리 마을이 보인다. 저기가 우르테가일 거 같고 저기는 어디일 거 같고 영 막막하다. 일단 김여사에게 내려가서 첫 마을에서 더 갈 건지 판단하자고 하면서 길을 내려간다.
다시 후두둑 비가 내리는데.. 온통 돌 뿐이다.. 이때 짜증으로 사진도 못 찍었다. 역시 많은 비명소리(돌 밟으면 다리가 아파서)와 욕을 난사하며 내려가고 있었다. 김여사는 내리막에서는 항상 나보다 훨씬 느리다.

2시가 다 돼가는 시간에 앞에서 여자 한 명이 커다란 가방을 메고 역방향에서 올라온다. 자세히 보니 수녀복이다. 말을 걸어보니 산티아고에 갔다가 걸어서 다시 오신다고 한다. 듬직한 체구에 정말 이쁜 얼굴을 가진 젊은 수녀님이 봉쇄 수도원의 수녀복 같은 차림으로 우리의 2배나 되는 가방 메고(우리 같은 배낭도 아니다) 한 손에 지팡이 들고 올라오시는 모습은 나를 정말 초라하게 만들었다. 오늘 만난 분들에게 이 길은 무슨 의미일까?

페르돈에서 우테르가로 가는 길은 내리막을 다 내려가자, 빗방울이 굵어진다. 더욱이 완전 비포장에 온통 진흙 뿐이다. 바로 언덕 아래로 국도가 보이지만 내려갈 수도 없다. 길고 지루한 진흙길은 돌무더기로 부셔놓은 발목에 엄청난 무게를 전해주었다.
내 기억 속에서 페르돈을 넘던 이 날이 가장 힘들고 지루했던 하루인 것 같다.

오르막 내리막을 몇 번을 거듭한 후 우테르가 입구에 성모상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진짜 다 왔다. 여기서 어떻게든 걸음을 멈춰야 한다 (나중에 인수씨는 요 성모상을 보고 눈물이 났다고 한다.).


마을에 들어서자 온통 공사 중이다. 당연히 지자체 알베르게는 닫혀 있다. 사설 알베르게를 찾아야 하는데 마을 끝이란다. 끝자락을 찾아도 안 보인다. 공사장 근처로 다시 돌아가 보니, 카페와 알베르게를 겸하는 카미노 델 페르돈이라는 사설 알베르게가 문을 열고 있다. 일단 커피를 주문하고 몸을 녹이며 이곳에서 묶기로 한다(1인당 10유로).

바의 2층과 3층인 알베르게에는 아무도 없다. 일단 신발과 스패츠를 닦아 마른 신문지를 꽂아서 입구에 가져다 놓았다. 간단히 정비를 하고 샤워를 마치고 추워서 침낭지퍼를 목까지 끌어올리고 그 안에서 조금 쉬고 있자. 독일에서 온 마틴이 들어온다. 설마 했지만 이 큰 알베르게를 우리 둘이 쓰는가 하는 꿈은 사라졌다.

 

7시가 조금 넘어 아래층으로 내려가 식당에서 1인당 12유로에 순례자메뉴를 먹는다(하루에 한 끼라도 잘 먹어야 된다. 그리고 이 곳은 주방이 없다). 혼자 걷는 마틴도 함께 자리를 하고 식사와 와인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틴은 팜플로냐에서 출발했고, 40대 후반인데.. 2주간 휴가를 내고 팜플로나부터 시작해서 레온까지만 걸을 예정인데, 별 준비 없이 시작해서 어디선가 스패츠를 구입해야할 것 같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도 이 길을 걸었다고 한다.
나중에 우리끼리 마틴의 통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부싸움 뒤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나 까미노로 가출한 거 같다면 킥킥 거렸다.

한참 밥을 먹는데.. 카우보이 모자에 가죽 잠바를 입고 부츠를 신은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세뇨리따 어쩌구 저쩌구하며 술과 우유를 시킨 건지 그냥 달란 건지 모르겠지만  벌컥벌컥 마신다. 이빨은 듬성듬성 빠져있고 매우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순례자 보다는 유랑하는 노인 같아 보이는데.. 우리에게 밥은 얼마냐, 방은 얼마냐 묻더니.. 잠시 뒤 알베르게에서 함께 잠을 잔다.
그는 이번이 세 번째 순례인 영국에서 온 할아버지란다.. 다양한 사람들이 걷는 길이다. 멀쩡한 사람은 별로 없다.

밥 먹고 내일 일정을 정리하다가.. 아무래도 내일은 쉬는 셈치고 푸엔테 라 레이나(12km)까지만 가기로 했다. 현재 우리 상태는 휴식이 필요하다. 이제 등산화를 벗고서는 계단을 내려갈 때 무언가를 짚지 않으면 내려갈 수 없다.. 심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