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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no de Santiag

산티아고의 길 5 - 쥬비리에서 팜플로냐까지(3월 15일, 22Km)


몸이 힘들어지면, 마음이 힘들어지고, 마음이 힘들어지면 분쟁이 생기고 고집이 생긴다.
세상을 보러 왔지만 걷기에 바쁘고, 길을 만나고 사람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내리막이라고 생각한 길은 아직도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해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올라가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려가는 길은 없다.

비오는 날, 걷는 것은 두 배로 힘들다.


쥬비리 - 이야리츠 - 에스키로츠 - 라라소나 - 아케레타 -
이로스 - 수리아인 - 사발디카 - 메르바예스 산 - 팜플로냐

오늘은 Navarra 지역에 주도인 Pamplona까지 걷기로 했다.
팜플로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제법 익숙하게 들어본 적이 있는 도시이다.
왜냐면 7월이 되면 이 마을 구석구석을 소들이 뛰어 다니고, 사람들이 그 골목에서 뒤엉키는 페르민 축제를 벌이는 것으로 매우 유명하기 때문이다.
기원전 1세기에 세워진 도시이며, 이 길에서 만나는 첫번째 큰 도시라고 하는데 주위를 돌아 볼 여력은 아직 나에겐 없다.

물론 오늘도 일빠로 일어나(나를 아는 분들은 알겠지만 난 부지런하지 않다.) 몸을 푼다. 김여사는 벽을 잡고 몸을 푸는 장면인데. 왠지 어설프다. ㅋㅋ.
새벽녘 여명 속에서 가랑비가 내리지만.. 나도 대충 발목 몇 번 돌리고, 허리 몇 번 돌린 후 스트레칭 끝이라고 우긴다.


어제 들어온 라비아다리로 다시 나가, 몇 걸음 걷자 마자 또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한다. 오른쪽으로는 채석장 같은 공장이 보이고, 비포장 도로길의 오르막을 오르다 빗방울이 조금 굵어진다. 일단 가방을 레인커버를 씌우고 나니 밸트쌕이 젖기 시작한다. 가지고 있던 비니루로 서로의 밸트쌕에 비니루를 씌우라고 권하다 결국... 둘이 싸운다(형님 먼저 아우 먼저처럼 서로 요 비닐로 씌우라고 하다가).
서둘러 비를 피하고 정비해야 하는데, 내 말을 듣지 않는 김여사에 열 받아서 그냥 마구 혼자 걷다가. 다시 되돌아 간다. 결국 비니루 때문에 첫 싸움이 시작됐다. 그래도 의지할 건 둘 뿐인데.. 절뚝거리는 김여사 찾아가 서로 미안하다고 하며.. 1차 전쟁은 쉽게 정리됐다.
약간은 서먹서먹하게 조금 길을 걷다 보니 언덕 마루에 작은 마을이 나온다. 

다행이 이아리츠라는 마을에는 순례자를 위한 쉼터인양 처마가 있는 휴게공간이 있다. 바로 오른쪽에는 식수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아직 라라소나 근처도 못 왔지만 여기서 아침을 먹기로 한다. 아침은 빵과 하몬 그리고 어제 샀다가 개봉도 못 해 아까워서 들고 온  와인 한 병으로 병나발 ㅎㅎ

아침을 먹은 건지 아침술을 한 건지 일단 먹고 나서, 아까 싸운 거 다시 화해하고... 우비와 스패츠를 착용하고 비에 대비해 철저히 정비한다(그리고 내 밸트색은 이때부터 무조건 가방 안으로 넣는다) 
우리가 아침을 먹으면 정비하는 사이 한두 명씩 순례자들이 우리를 앞지른다.

 

비는 좀 더 세차게 내리고 속도는 안 난다. 길은 계속 돌과 진흙으로 가득하고, 자전거를 탄 순례자마저 돌밭 샛길로 우리를 지나쳐 간다. 카메라를 꺼내기 힘들 만큼 비가 온다. 이제 라라소나에 도착했다. 달랑 5.5km를 걸어왔는데... 힘들다.

몸을 녹일 요량으로 바를 찾아 보았다. 먼저 와 있던 스페인의 은퇴한 공무원 카를로스가 문을 연 바가 없다며, 문 닫은 바 처마 앞에서 비상식량을 먹으며 쉬고 있다. 지금부터는 바도 찾아야 하고, 우리 김여사의 화장실도 찾아야 한다. 라라소나는 순례자용 병원까지 있는 큰 마을이라지만 9시가 넘어도 문을 연 곳은 없다.
그 사이 젊은 순례자 무리가 왔다가 쉴 곳이 없다는 말에 우르르 그냥 지나가고.. 어제 쥬비리 알베르게가 만원이라 라라소나에서 잤다는 크리스티나와 이바가 방금 바에서 아침을 먹었다는 말에 우리는 화장실과 바 찾기에 열중한다. 김여사의 컨디션도 영 아니다...
물론 결론은 노상방뇨와 쓸데 없는 마을 끝에서 마을 끝까지의 마을탐방으로 끝난다. 결국 카를로스가 서 있던 그 처마 밑에서 재정비를 한다. 김여사의 스패츠가 커서 흘러내려 배낭을 뒤져 찾은 몇 개의 핀과 무릎보호대로 고정하고(정말 폼 안 난다, 서울에서 한 번 착용해 보고 올 걸...) 길을 떠난다.


시간도 너무 소진하고.. 저 돌길과 흙길의 부담스러움으로 과감한 135번 국도를 따라 걷기로 시작된다.
지도를 보니.. 산길로 가나, 국도로 가나 다시 만난다.. ㅋㅋ
하지만 우리나라 국도와 달리 스페인의 국도는 갓길이 없거나 아주 좁다. 요 길로 3킬로를 비오는 날 걷는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몇 번을 멈춰서고 트럭에서 튀는 물을 피하면서 힘 내라고 노래를 함께 부르며 걷는다.
다행히 국도를 따라 수리아인에 도착하니 스페인 대학생 3명(사실 고삐리 인줄 알았는데... 어려 보여서)이 처마 밑에 자리를 잡고 쉬고 있다.. 물론 바는 없다... 위험한 찻길 옆으로 걷기를 포기하고 이제 산길 루트로 들어간다.

 

길은 흙 아니면 돌이다. 흙은 다리 전체를 무겁게 하고 돌은 발바닥과 발목에 아픔을 준다.
그래도 간간이 나타나는 마을에는 처마 밑에 의자를 두고 순례자들이 쉬어 갈 수 있는 작은 공간이 된다. 물론 이렇게 배려처럼 느껴지는(자신들을 위해서 지어놓았 건) 속에도 동네 개들의 울부짖음도 있다.  

이로스 마을 성당 옆 집 앞에서 쉬고 있는데 집주인이 토끼 몇 마리의 가죽을 벗긴 채 들고 나온다. 여느 때 깥으면 놀라서 사진이라도 찍었을테지만, 물 몇 모금, 땅콩과 과자를 먹고 그냥 쉰다.
이 때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던 캐나다인 캐서린이 지나가길래 한국 사탕을 쥐어줬다. 넘 맛있다며 생글거린다. 잘 걷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녀의 발은 온통 물집이었다..

다시 아르강을 건너 길을 걷다보니 두 개의 길이 나온다. 하나는 잘 정리된 공원길, 하나는 순례자용 진흙길. 물론 나는 지겨운 진흙길을 패스하고 공원길로 걷는다. 사발디카라는 마을은 내 옆으로 지나가고 노란 화살표를 찾아서 계속 걸어간다.
다리가 아픈 캐서린은 그냥 진흙길로 걸어가고... 짧은 거리였지만 뭔가 미안한 마음이 든다.

걸어가다 네르발 산을 오르기 전 국도와 연결된 작은 쉼터가 나온다.  멀리서 이바와 크리스티나 할머니가 걸어온다.
진흙구덩이인 산을 한참 오르다 다시 크리스티나를 보니 절뚝거리는 다리가 영 안쓰러워 보인다. 크리스티나에게 나의 스틱을 쥐어주며 이거라도 쓰라고 하니 자꾸 사양을 한다. 팜플로나의 알베르게에 있을거니 거기서 주면 된다고 이야기하고 할머니들에게 내 스틱 한 개를 빌려드렸다.

이 산길에는 예전 당나귀를 끌고와서 순례자들이 묶었을 여곽의 흔적이 조금은 지금의 기능성에 집착한 순례자를 숙연하게 해준다.. 숙연도 잠시 나는 진흙과 돌 사이에서 "씨~~~~8!"를 외치며 걷고 있다.  

산을 넘고 나니 작은 터널이 나타나고, 분주히 지나가는 차들 사이로 도시의 흔적이 보인다. 지도에는 오늘 길에 가장 높은 산이 나타났지만... 다행히 아스팔트 길이다. 비도 조금씩 잦아든다... 길가로 흐르는 소량의 물에 신발에 진흙을 조금씩 지우며.. 걷자니 전길줄에 운동화가 걸려있다. 열 받은 순례자가 재주 좋게 걸어 놓은 것 같은 운동화들을 보니, 나 보다 열 받은 인간들 참 많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멀리서만 보이던 팜플로냐가 눈에 들어온다.. 잘 포장된(착하게 포장된 길) 길을 따라 산을 내려와 다리를 건너니 오늘의 목적지 팜플로냐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시는 도시다. 아직 목적지인 구시가까지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한다. 도시의 깔끔한 옷차림들 속에서 진흙 투성이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이다.  더욱이 도심에는 화살표를 찾기도 힘들다. 하루종일 따뜻한 것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왠 레스토랑에서 빠에야 그림이 보인다. 밥이다.. 그냥 달려들어가서 빠에야 2인분(30유로, 나중에 영수증 보고 놀랐다. 순례자에겐 넘 비싸다)러드를 시켜서 먹는다(물론 와인도) 이 설익은 밥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나중에 빠에야는 발렌시아에 가서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요 밥은 넘 배부르고 맛있었다.

밥 먹고 나니 걷는 것도 조금 귀찮다. 비도 그치고.. 버스라도 있음 타고 가고 싶다. 그래도 그리 멀지 않겠지 하면서 걸어갔다. 웬걸 구시가까지는 한참이다.. 역시 안 는 스페인어(아직 돈데 에스떼~~~ 안 배운 상태)와 영어로 길을 물어 물어 구시가를 찾아간다. 멀리 다리 하나가 보이고 다리를 건너자 마자 팜플로냐 성으로 들어간다.

팜플로냐 성은 외관에서 보이는 중우함이 엄청나다. 성의 외벽과 내벽이 모두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다.. 달랑 사진 몇 찍고 무조건 목적지로 가려니 못내 아쉬움이 남아 길 는 사람 붙잡고 인증샷 찍어 달라고 했다.
어찌됐던 우리는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성 안으로 들어가서 대성당 옆에 위치한 알베르게를 찾아간다. 크리스티나는 우리가 빠에야를 먹는 사이 벌써 와서 스틱을 주려고 기다리고 있다. 오늘 팜플로냐를 벗어나 라라소나까지 간다고 한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이바가 카미노를 잘 마치기를 기원했다.
6유로에 침대 커버를 받고 안으로 들어가니 벌써 많은 순례자들이 와있다. 일단 씻고 정비를 한다. 진흙투성이 신발과 스패츠 닦아 말리고, 젖은 옷가지는 따로 손질해 건조기에 돌린다.

대도시는 시에스타가 거의 없다. 몇 일간의 경험은 일단 도착하면 씻고 슈퍼마켓을 찾아 먹을 것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발목을 고정하는 등산화와 발목보호대를 풀르고 나면 다리를 절 수 밖에 없다. 일단 절뚝거리면서 한국에서 가져온 핸드폰 심카드 문제로 이통사 대리점을 찾았다. 보다폰에서는 자기들은 어쩔 수 없다고 한다. 핸드폰 그거 안 되면 어떠냐 생각하며... 카스티요광장에 가본다. 관광지답게 사람들이 많다. 잠옷 입고 절뚝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은 우리 뿐이다. 웬만한 비는 맞고 다닌다 ㅋㅋ

구경을 하려면 볼 것 많은 관광지이지만.. 엽서 몇 장(요 엽서가 얼마나 부담됐는지)과 슈퍼에서 먹을 거리를 사서 알베르게로 들어간다. (요 슈퍼 중 중국인이 하는 슈퍼에 신라면이 있었다고 한다)
힘들고 귀찮고... 발 뻗고 있는 것이 짱이었다.

알베르게는 보통 이층 침대, 주방(있으면 다행), 화장실, 샤워실 그리고 세탁실로 구분되어 있다. 여기 알베르게는 시설이 훌륭한 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방에 물건을 줄이는 것이 좋을 거 같았다. 배부르게 먹은 빠에야 때문에 저녁은 간단하게 알베르게 주방에서 해결하기로 하고.. 가지고 온 미역국과 전투식량형 비빕밥을 먹었다.. 물론 와인과 빵도..

그리고 항상 스쳐 지나가던 인수씨와 몇 마디 인사도 나누고 내가 가져온 라면스프 몇 개와 건조김치 등을 나누어 주었다.

생장과 론세스 부터 줄 곳 함께 걸어온 많은 사람들과 이날 이후 일정이 갈렸다. 이미 발목과 다리에 무리가 간 몇몇 사람들은 팜플로냐에서 하루 더 묶기로 했고(그래서 패트릭과도 인사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튼튼한 사람들은 조금 더 먼 곳까지의 여정을 잡았다(위의 사진은 독일 친구 패트릭의 모습, 아래의 사진은 스페인 친구 알베르토의 모습).

내일 어디까지 갈지 결정을 못했지만 나도 뭔가 이별을 예감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기념품 몇 개를 돌리자..크로아티아에서 온 마르코와 안드레아는 자신들의 수호성인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나에게 주었고.. 스페인 아저씨 카를로스는 스트레칭 방법이 담긴 종이를 건네주셨다.
 
팜플로냐에서 일정을 시작하는 초행자들(멕시코 커플 포함)과 인사도 나누고, 젊은이들은 밤 사이 2층 주방에서 술 몇 잔을 기울였다고 하는데.. 나는 비에 젖은 하루를 정리하고 잠들었다..

오늘도 내일은 얼만큼 갈 건인지, 내 몸은 얼만큼 견딜지 그런 걱정만 하는 철 없는 카미노였다....
아직 하늘을 보지도,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가슴을 열지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