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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no de Santiag

산티아고의 길 13 - 산토도밍고에서 벨로라도까지(3월 23일, 25km)


언덕을 오를 때는 오르기에만 전념하면 된다. 목표가 한정되고 무엇이 나올까 하는 기대감까지 더해지면 오르기는 집중력이 배가 된다. 그러나 언덕에 올라 목표물이 보이지 않는 순간, 힘이 빠지고 속도는 느려진다. 눈에 보이는 끝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하고 나면 더욱 힘들어 진다.
이런 길을 걷는 나에게 되뭍는다. '너 여기 왜 온 거니?' 나는 대답하겠지 '그냥~~!!!'


산토도밍고 - 그라뇽 - 레데시야 델 카미노 -카스틸델라고도 - 빌로리아 - 비야마요르 - 벨로라도

어제 남은 밥으로 아침을 먹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출발 준비를 한다.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내 나가려니, 오스피탈로(알베르게 관리인)가 일일이 악수를 하고 문 밖까지 배웅을 한다. 나이 지긋한 오스피탈로의 배웅을 받자니 너무 고맙다.

평소보다 출발이 늦다. 거의 대부분의 순례자가 길을 떠나고 나서, 알베르게 앞 광장에서 몸을 푼다. 손이 시리다. 어제 늦게 도착해 마을을 제대로 둘러 보지도 못한 채 이 역사와 전설 속의 마을을 떠나려니 조금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도 부지런히 산티아고를 향해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마을 외곽으로 나가 오하강을 가로지른 커다란 다리를 건넌다. 순례길을 만든 산토 도밍고의 '성인의 다리' 라지만 지금은 현대식 다리를 따라 걸어간다. 조금 늦은 출발이라 멀리서 두 세 명씩 무리지어 가는 순례자들이 보인다. 앞서가는 사람들을 따라 길을 걷는 것은 홀로 외로히 걷는 것 보다 훨씬 편하고 안정된다. 앞선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그 다음 길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길을 따라 한참을 걷는다. 이제는 뒷모습만 봐도 앞에 가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에스토니아에서 온 친구들이다. 그리고 그 앞으로는 스페인 친구들이 걷는다.
아침에 넓은 평야는 서늘하다. 위도 상 우리나라 보다 낮은 곳이지만 이곳은 해발 600미터 이상의 고지대이다. 온기를 느끼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다.

멀리 그라뇽 마을이 보이지만 화살표는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마을을 우회해서 들어가는 모양이다. 괜히 손해 보는 것 같아 섭섭하지만..오전에는 마음이 너그럽다.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식수를 받고 마을로 들어간다. 작은 가게처럼 생긴 곳에 사람들이 보인다. 따스한 커피라도 한 잔 할 요량으로 들어가 보니 이 마을 사람들과 스페인 친구 셰마가 차를 마시고 있다. 우리도 커피 한 잔과 작은 빵 하나를 먹는다. 노르웨이에서 온 할머니가 들어와 함께 앉는다. 따스한 온기에 몸을 녹이고서는 다시 길을 나선다.

너른 평원으로 이어진 길은 끝없이 계속된다. 포장길과 비포장길이 계속되지만 그래도 바닥에 돌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오늘은 걸을 만하다. 멀리 보이는 산도 들도 걸으면 걸을수록 가까워진다. 한걸음 한걸음 움직이는 만큼 나는 산티아고에 가까워지고 있다.

멀리 큰 간판이 보인다. 카스틸리아 레온주로 들어선다는 입간판이다. 나바르지역을 지나 리하오지역, 이제는 카스틸리아 레온이다. 독일에서 걸어온 부부의 사진을 찍어주고 우리도 사진을 찍는다. 
 

너른 평원은 대부분 농지다. 돌이 있으면 있는데로, 없으면 없는데로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는다. 우리나라 땅 같으면 악착같이  모든 돌을 골라서 작물을 하나 하나를 심었을 것 같은 땅이다. 그러나 이곳은 광활한 평야에 듬성듬성 돌들이 보이고 커다란 기계로 농사를 짓는다. 풍요의 댓가는 농작물의 가격하락인지 지나는 마을은 그다지 부유해 보이지는 않는다.
길에서 에스토니아 삼총사를 자주 만난다. 그들은 우리를 볼 때마다 웃는다. 우리가 웃긴가? 우리도 그들을 보면 로스 아르고스의 그 수영모자가 생각이 나서 큭큭 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계속 마주친다.
 

레데시아 마을에 도착하니 깔끔하게 정리된 마을 입구에 벤치가 놓여 있다. 입구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어제 사둔 나란하(오렌지)와 만사나(사과)를 꺼내 먹고 있자니, 어제 뵌 한국분이 지나간다. 인사하고 사과를 권하니 처음엔 먹지 않겠다고 하더니 "원래 안 먹는데 그럼 하나 먹을께요"하며 받으신다. 어제 우리가 도로 나온 아소프라 알베르게에서 묶고 새벽부터 길을 걸으셨단다. 바로 다시 길을 간다. 혼자서 걷고 싶은지 사람을 꺼리는 것 같다. 이해가 되면서도 좀 섭하다.

얼마 걷지 않아 카스틸델가도라는 작은 마을이 하나 나온다. 쉰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냥 지나간다. 바나 카페라도 있으면 쉬어가겠건만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배달민족의 배달음식과 야식들, 따스한 찜질방 그리고 무엇보다 24시간 편의점이라는 게 너무 그리워 진다. 시고 달고 짠 그 음식들...

걷다 걷다 보니 산토 도밍고의 생가(다 허물어져가는 건물이었다)가 있는 빌로리아에 도착한다. 차로 실어 온 과일을 팔고(시골 마을에는 빵, 채소나 과일 차가 시간에 맞춰 마을에 도착해 이것들을 판다) 있어 아보카도와 몇 가지 과일을 산다. 비싸고 신선하지가 않다. 점심을 먹으려고 마을회관 같은 곳 앞의 벤취에 앉아 있자니 이번엔 빵차가 온다. 김여사가 지난 번 빵차에서 산 빵이 맛있었다며 사고 싶어하는데 나는 그냥 배낭에 있는 빵만 먹자고 말린다. 마른 빵, 하몬, 치즈와 과일을 모아서 점심을 먹는다. 아까 본 독일인 부부가 쩔뚝거리고 지나가고, 아까 본 한국 아저씨도 지나간다.

아직도 산티아고는 576km. 그러나 여기저기 적혀있는 문구마다 킬로미터는 들쑥날쑥이다. 좌우지간 나는 무지허니 걸었고, 산티아고까지는 무지허니 남았다. 계속해서 꾸역꾸역 걸어가는 수 밖에...

또 다시 시골길을 걷는다. 조금씩 오르막이 계속 되고, 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벌써 20킬로미터 정도를 걷다보니, 조금은 피곤해진다.
다행히 비야마요르에서 루트를 약간 벗어난 곳에 찻길을 건너 바가 있다. 바에 들어가서 잠시 쉬기로 하고 커피와 맥주를 한 잔 시켜 놓고 잠시 쉰다. 화물차 운전자들이 잠시 쉬는 곳 같다. 바로 옆 식당이 유명한 식당이라는데 별로 관심이 안 간다. 맥주 한 잔이면 충분하다.
제법 햇빛이 있었지만, 바람 역시 세차서 춥다. 

둘이서 영화 '미션'의 이야기를 한다. 남격 때문에 최근에 다시 본 영화다. 주인공 이름이 누구더라로 시작해서 좌우지간 둘이 한참 떠들다 스틱을 들고 내가 장난을 친다. 찻길을 따라 난 길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앞에 에스토니아 삼총사가 길게 뻗은 길을 일렬로 걸어간다. 에스토니아에서 휴가를 내서 이 길을 걷는 친구들이다. 하이킹 동호회 친구라는데, 걸음도 느리고 튼튼한 몸에 비해 그리 잘 걷지도 못한다. 더욱이 매일 스파게티를 먹고 나서 맥주와 와인을 마시면서 원카드를 한다. 
우리도 걸음을 빨리해 이들을 따라간다. 내가 슬며시 따라가 그들 뒤에서 줄을 맞춰(걸음걸이도 같게) 걸어가니 김여사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다 못해 주저앉으려고 한다. 길고 지루한 길을 에스토니아 삼총사 덕에 쉽게 걸었다.

어느새 벨로라도에 도착했고, 해발 8백미터라는 이곳은 그런 느낌은 들지 않는다.
마을 초입의 첫 번째 알베르게(사설 네트워크 호스텔)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설도 깨끗하고 우리가 첫 손님이다. 잠시 후 무니시팔이 문을 닫아 1킬로미터 이상을 다시 돌아 온 에스토니아 삼총사가 들어온다. 오랫만에 수압도 좋고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세탁기도 돌린다. 밀린 빨래가 많다(기계 상의 문제로 건조까지 6시간 정도 걸렸다. 허~걱!), 
그냥 메뉴를 먹고 싶은데 김여사는 만들어 먹자고 한다. 나는 등산화를 풀고 나니 도무지 나는 걷기 힘들고 열도 난다. 김여사가 혼자 가게를 찾아 마을을 찾아 간다.
한참을 지나도 오지 않는다. 미안하고 걱정 되서 나가 보니 한 손엔 와인 병을 들고 내일 먹을 음식까지 잔뜩 사들고 뒤뚱뒤뚱 걸어온다.
힘을 내서 로그로뇨에서 산 라면에 마카로니, 햄, 조갯살 등을 넣고 라볶이를 만들고 야채와 와인을 곁들여 먹는다(요리는 내 담당).
나바라떼에서 같은 방을 썼던 독일 할아버지들이 오늘은 무척 지쳐 보이신다. 김여사 윗층에 자리를 잡으셨는데 침대 오르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바꿔드릴까 여쭤보니 괜찮다고 하신다.  


* 밖의 바람소리가 세차다. 온통 다 날려 버릴 것 같다.

그래도 오늘은 별로 힘들지 않게 이곳에 도착한 것 같다. 어제 보다 푸르고 상쾌한 공기 덕분인 것 같다. 지금 같아선 25킬로미터가 좋은데 30킬로미터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뚠은 컨디션이 너무 안 좋다. 다행히 하나 있는 단층 침대를 잡았다. 지금 약을 먹고 잠 들어 있다. 진통제를 3일 이상 먹지 말라고 했는데 벌써 11일째다.

밖이 추운데다 겉옷을 다 세탁기에 넣어버려서 춥다. 이가 다 빠지고 더러운 식기들을 닦아서 차 한 잔을 끓여서 앉아 있으니 추위가 좀 가시고 마음도 여유로워진다. 정말 더 단순해진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그런데 솔직히 아직도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일어나서 그냥 걷고 또 걷고 있을 뿐인 것 같다. 그 답을 애써 찾으려 하지 말자. 언젠간 알게 되겠지. 그냥  하루하루, 순간순간에 충실하자.

우크 삼총사와 슈퍼마켓 같이 가려고 했는데 너무 미적거려서 먼저 나간다.  비가 올 것처럼 어둑어둑하다. 미로 같은 한적한 길을 따라 슈퍼마켓을 찾자니 무섭기도 하다. 다행히 여러 번을 물어 찾아 들어갔다. 지나가던 셰마가 나를 보고 들어온다. 친척 아저씨 만난 것처럼 반갑다. 다시 찾아 나오는 것도 만만치 않다. 겁 많은 나는 혼자서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마냥 존경스럽다. 양 손에 한가득 짐을 들고 뛰다시피 걸어가다 보니 밖에 나온 뚠이 보인다. 날씨가 추운데 왜 나왔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반갑다.

뚠이 만들어 준 라볶이를 다 먹을 무렵, 내가 나간 후 바로 슈퍼마켓을 찾아 나온 우크 삼총사가 한참을 헤매다 겨우 장을 보고 들어서다가 우릴 보고 놀랜다. 나도 놀랜다. 미안하다. 원래 그들을 쫓아가려고 한 건 나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