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시드의 고향 브루고스를 앞두고 있다. 여정 중에 만나는 도시는 조금씩 부담스러웠지만, 여정 중에 처음으로 하루의 휴식을 준비하는 우리에게는 재충전의 시간을 제공하는 장소가 될 것 같다. 길을 걸으며 친해진 사람들과 또 하루, 이틀 시간의 간격이 그만큼의 거리를 만들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직 같은 길을 걷고 있다.
길을 나서자 안개가 자욱하다. 아침 바람도 제법 차갑다. 마을을 벗어나 차도를 따라 걷다보니, 역사책에서 자주 보이던 선사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단 간판이 여러 개 보인다. 선사시대 유적지가 이곳에서 발견되었단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고, 알타미라와 같은 시대에 사람들이란다. 멀리 오른편 건물은 아마 박물관이나 기념관인가보다.
아타푸에르카에 다다르니 선사시대 유적지를 이용한 다양한 조형이 나타난다. 이전 인류의 모습과 몇몇 친구의 모습이 교차된다^^. 다들 잘 살고 있으려나... 이른 아침이라 마을은 조용하다. 멀리서 개 짓는 소리 정도만 들린다.
마을을 벗어나려는데, 이정표 위에 등산화가 올려져 있다. '저 사람은 부르고스까지 맨발로 갔나?' 불편한 신발을 벗어던지고 샌달이든 맨발이든 그는 이길을 걸었을테니까?
이정표 위에 사람들은 돌을 올린다. 사실 돌은 길의 난이도를 의미하는 약속이다. 큰 돌을 올려놨으면 힘든 길, 작은 돌은 쉬운길 이런식으로... 그러나 그런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돌을 올려서 이제는 그런 의미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신발 하나가 올려진 길... 지금부터 1,070미터를 올라가는 거다.
오르막을 오르자 마자 나타난 길은 완전 자갈밭이다. 경사진 길은 온통 양 똥(사진에 보이는 검은 색)이 깔려 있고, 온갖 돌들이 덮혀 발바닥을 찌르기 시작한다. 왼편으로는 군사지역이라는 푯말과 철망이 이어지고, 바로 앞도 옆도 구분하기 어려운 짙은 안개로 둘러쌓여 있다. 불평이 나오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오늘 걷고 나면 내일은 쉴 수 있다!!!
갑자기 자욱한 안개 사이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신음소리 같은 소리와 딸랑 딸랑 거리는 소리. 안개는 자욱하고, 한 없이 오르는 오르막에 금새 땀이 범벅이 되어 있는데.. 자꾸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다 갑자기 눈 앞에 달려오는 수 백마리의 양떼와 마주선다. 으~악! 공포 그 자체였다. 사진에서 본 평화롭고 예쁜 양은 어디에 있나? 더욱이 이놈들은 사람을 무서워 안 한다. 집채만한 양떼몰이 개도 무섭고, 양도 무섭고, 그 사이에도 뒤로 물러나면서 사진 몇 방 찍고 그냥 냅다 산으로 도망간다.
스페인 산 정상은 대부분 십자가가 꽂혀 있다. 1,070미터 정상에서 서쪽으로 부르고스시가 보여야 하지만 오늘은 짙은 안개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돌무더기만이 무엇인가를 상징하는 싸인을 가진 채로 계속 원을 그리며 인위적으로 펼쳐져 있다. 우주선이 남긴 흔적 같기도 하다. 인근의 광산과 송신탑의 모습으로 오묘하기까지 했다. 이제 내리막이 이어진다.
산 정상의 부르고스 마크와 내가 알 수 없는 스페인어 문구는 순례자를 위한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당....
언덕에서 조금 내려 오자, 안개가 모두 산에만 걸쳐 있었던 건지 맑게 개어 있다. 돌길을 따라 한 두명의 젊은 순례자가 우리를 앞질러 내려간다. 드넓은 개활지와 멀리 도시의 모습이 살짝 눈에 들어온다. 오른편으로는 채석장의 흉측스런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여기도 이곳 저곳에 개발의 상흔들이 널려있다.
아, 저 넓은 초원과 언덕을 가로 질러야 부르고스에 도착하는구나....
습하던 기운은 어느새 가시고 다시 뙤약볕이다. 언덕 숲길을 내려오자 작은 마을들이 하나, 둘 나타난다. 이 차도를 통해 이어진 길을 보니 부르고스에 가까와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작은 마을이라 작은 bar 하나 나오지 않고, 도시의 물건들을 활용하는 듯한 폐차장이나 고물상 들만이 눈에 들어온다. 지도를 보면 작은 길들이 더 지름길일 것 같지만, 그냥 큰 길을 따라서 다음 마을로 걸어간다.
한참을 걸어서야 '카르데뉴알레'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지도에 바가 있다. 뜨거운 햇살에 쉴 곳이 필요했던 우리는 이곳에서 쉬기로 한다. 이미 셰마를 비롯해 몇 명의 스페인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맥주와 카페콘레체를 시키고 여장을 푼다. 젊은 아프리카계 여자가 주인이다. 친절하게 테이블로 음식을 가져다 준다. 잠시 쉬면서 차를 마시자 셰마와 다른 이들은 여장을 꾸려 나간다. 그들이 가고 한참 뒤 화장실에 가보니 등산용 장갑 한 짝이 눈에 들어온다. 부르고스에 가면 만나리라 생각하고 주인에게 우리가 가져가겠다고 이야기하고 길을 나선다. 우리가 제일 늦게 나와서인지 독일 아저씨가 놓고 간 반찬 통도 챙겨서 나왔는데, 오늘은 배달의 날인가부다.
길을 나서자 나름 유명한 벽화가 마을 어귀에 그려져 있다. 사실 너무 많은 욕심으로 문명을 지고 가는 순례자를 풍자한 그림인데 넘 이쁘다. 우리 둘은 사진을 찍고 길을 나선다.
어제 너무 무리한 탓에 오늘 길은 생각보다 쉽게 지쳐서 많이 힘들다.
카르데뉴알레에서 오바르네하 카스테냐라스까지는 사진도 없다. 사진이 없다는 건 힘들거나 비가 왔다는 건데 이날은 비가 오지는 않았다. 가이드북에 적혀 있는 바로는 오바르네하의 식당이 유명하다며 권하고 있어 꾸역꾸역 걸어갔지만.. 그런 식당은 없단다. 단지 허름한 바 뿐이라 그냥 지나쳤다. 점심 때가 지나 배도 고프고 화장실도 급하지만 참기로 하고 걷는다. 시내가 가까워져 무언가 있겠지 했지만 오산이었다.
언덕에 올라오니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 사이로 갈림길이 나온다. 고속도로 주변 같은 곳에서 아파트 단지가 있어 그 앞 벤치에서 잠시 신발을 풀렀다. 다리가 넘 아프다. 아무것도 팔지 않는 마을을 지나 갈림길에서 좌측의 비행장쪽 길로 길을 걸어간다. 아무래도 이 길이 더 힘든것 같다. 비행장 근처에는 깊은 또랑만 잔뜩 있고 길도 좋지 않다. 결국 또랑에 신발만 버린채 계속 걷는다 .이제는 공해로 찌든 도시의 외곽 냄새가 확연하다. 확실히 오염된 공기는 걷는 이들을 쉽게 지치게 한다.
활주로를 따라 걷는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결국 도착한 카스테냐라스 바에 들어가 음식을 시킨다. 이곳 사람들이 낯설다. 그들도 우리를 신기하게 본다. 가격도 생각보다 비싸다. 음식을 먹고 바 옆의 공원벤치에서 귀도 파고, 여행 경비를 점검하며 잠시 쉬는데, 방금 전 우리가 길을 물어보았던 여자가 버스를 타다 말고 우리에게 탈거냐고 물어본다. 순간 둘이 얼굴을 쳐다보고는 신발 끈도 묶지 않고 바로 올라타 버렸다. 1인당 0.85유로. 기사 아저씨가 버스비를 (실수로?) 더 받자 그 여자분이 나서서 돌려받아 준다. 고맙다.
"아싸 ~!"를 외치며 차를 탔지만 그것도 잠시 마음이 불편하고 후회가 되기도 한다. 큰 도시로 들어가는 초입이라 그냥 패스한다고 하긴 했지만(책에서도 패스하라고 써 있긴 했다) 이 길을 걸었을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약 4킬로쯤 가다가 차에서 내린다.
너무나 깔끔한 사람들 틈에서 지저분한 동양인은 도드라지게 눈에 뛴다. 걷다가 부르고스 초입의 등산용품점에 들어가 장갑을 사려고 찾아본다. 맘에 드는 물건이 없다. 이제는 대성당을 찾아서 걸어가야 한다.
큰 도시에서 카미노 마크를 찾아서 길을 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길을 놓치면 그냥 방향에만 의존해야 한다. 아까 너무 갑자기 버스에서 내렸다는 후회가 든다. 무작정 내려 헤맨다. 도시 속이라 상점들의 맛있는 냄새와 진열된 상품에 눈이 휘둥그래진 채 부르고스 대성당을 물어 물어 찾아가 본다.
길 바닥에 조가비 마크가 뚜렷하다. 대성당 뒤편의 알베르게까지 가는 길은 이제 그다지 어렵지 않다.
3시가 조금 넘어서야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부르고스 대성당의 당당한 위용 뒤편에 발을 주무르는 순례자의 동상이 있는 곳이 알베르게다. 16세기 건물을 최근 재단장해 신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단 접수를 하고 올라가 보니 최신 시설이다. 1층에는 로비와 전자렌지 등의 시설이 있고(그런데 불이 없고 포트도 없어 취사도, 뜨거운 물도 마실 수 없다), 2층과 3층은 파트션으로 나뉘어져 2층 침대로 2개씩으로 구성되어 있어 깔끔했다. 무엇보다 샤워시설이 많다. 일단 자리를 잡고 독일아저씨에게는 도시락통을, 셰마에게는 등산용 장갑(이미 셰마가 bar에 전화를 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을 건네주었다(서로 행복한 마음).
접수대로 내려가 내일 하루 더 묶어도 되냐니까 비수기라 가능하다고 한다. 우~와! 정말 행복하다. 안 그러면 내일 짐을 꾸려 다른 알베르게를 찾아다녀야 되는데 다행이다. 마음 편히 간단한 빨래를 한다.
빨래를 하고서는 절뚝거리며 부르고스 대성당의 광장으로 내려가 본다. 발목 보호대와 등산화를 벗으면 우리는 펭귄이 된다.
생각보다 웅장한 대성당 앞에는 관광용 기차가 돌고 있다. 대성당은 입장료를 받는데..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순례자 할인이 된다는 소리에 함 들어가 보기로 한다. 할인은 안 됐다. TT;;
대성당은 정말 크고 웅장했다 각각의 섹션과 더불어 작은 미술전까지 함께 하고 있었다. 나는 다리가 아퍼서 대충 들러보고 성당 구석의 예배당 의자에 앉아 죽치고, 김여사는 여기저기 둘러본다. 아무리 멋있고 다양한 성물들이 눈앞에 있어도 몸뚱이 아픈 걸 못 따라간다. 별 의지 없이 나와서는 일단 요기거리를 챙기기로 한다.
저녁이 되어 케밥으로 간단히 저녁을 먹은 후 인근 아일리쉬 펍에서 기네스를 엄청 맛나게 먹었다. 물론 굉장히 비쌌다.....
내일은 쉰다는 마음.. 그리고 깔끔한 알베르게, 친숙한 순례자들 잠이 잘 온다. 그래도 다리는 너무 아프다.
* 다시 길을 걷는다.
매일 아침마다 기적을 경험한다.
오늘도 꼴찌다. 그래도 오늘은 그 덕에 다른 순례자들이 놓고 간 물건들을 가져다 줄 수 있게 되서 기분이 좋다.
짙은 안개를 뚫고 소박한 십자가들이 길을 안내한다.
오늘은 정말 쉽게 지친다. 얼떨결에 버스를 탔지만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지나가는 길은 온통 공사 중으로 매우 복잡했다. 서둘러 내려 3.3킬로(헤맨 걸 합하면 4킬로는 족히 넘었을 것 같다)를 더 걸어 알베르게를 찾아갔다. 멋지다. 게다가 하루 더 쉴수 있다니... 감격스럽다.
성당 내부에서 전시관으로 향했다. 엘 그레꼬의 전시도 있단다. 20년 전 똘레도에서 그의 집과 작품을 보고 이곳에서 다시 볼 수 있다니... 생각보다 규모는 적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다른 성화들을 둘러보다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님을 앉고 있는 성모마리아(피에타) 그림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어머니의 망연자실, 분노, 절망, 받아들임 등의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너무나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는 눈을 보며, 크리스티나를 떠올렸다.
우리가 어찌 그녀의 아픔을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그녀에게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너무 미안하고 가슴이 저린다. 그저 그녀를 위해 기도를 할 뿐이다.
밤에 잠깐 비가 왔다. 난 내 수건만 급히 걷어왔다. 뚠이 다른 사람 빨래도 치워주지 그랬냐고 하는데 찔렸다. 아쿠아슈즈 사이로 빗물이 들어왔다. 발이 시리다.
미사를 보는데 발 뒷꿈치가 너무 아파 서 있기도 힘들다. 그동안 냉담을 오래 해서 눈치로 미사를 따라가기 힘들다. 이러다 산티아고에 못 갈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크게 다가왔다. 저 분만이 아시겠구나.
온 몸에 부항 자국 같은 피멍, 피딱지, 피곤함과 고통에 절어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저 분만이 그 길을 허락하셔야 갈 수 있겠구나. 그래야 내가, 뚠이 갈 수 있겠구나. 둘 중 누구 하나 포기해도 갈 수 없는 길일 수도 있겠구나.
간절하게 '허락해 주소서. 보호해 주소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당신이 허락하시는 길까지 제 걸음을 걷는 것 뿐입니다.'라는 간절한 기도를 한다. 당장 허물어져내릴 것 같은 저 분에게... 만감이 교차한다.
이 분이 인도하고 허락하시는 길을 기꺼이 밟겠다는 내 의지... 과연, 이 모든 것이 가능한가?, 인간의 의지란 뭘까?
모든 것은 그 자리에서 제 몫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내 맘에 맞다고, 또는 맞지 않다고, 그래서 좋다고, 싫다고, 불편하다고 끊임없이 평가하고 판단하는 나.
흐리면 흐린대로, 좋으면 좋은대로, 뜨거우면 뜨거운대로 순종하고 가는 것일 뿐인데...
책에서 본 '내 영혼은 이 길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구절이 하루종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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