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마을 에스테야로 가는 길. 더 이상 비는 오지 않는다. 이제는 구름을 기대하며 햇살을 맞이한다(순례자가 걷기에는 구름 낀 날이 최상이다).
중세시대의 다리는 아직도 순례자들에게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동이 터오르기 전 다리를 건너 또 다른 마을로 향한다. 비가 그쳐 기분이 상쾌하지만, 아직 이른 아침의 바람은 차갑기만하다.
마을 끝자락에 가리비를 매단 십자가가 눈에 들어온다. 가리비는 산티아고의 상징이며, 지금은 순례자의 상징이다. 이 마을의 모든 것은 순례자를 위해 가꾸어진 양 마지막 인사마저도 십자가를 통해 전하는 듯 했다.
마을을 벗어나 뒤돌아 보니 멀리서 해가 떠오른다. 햇살을 받는 과거에 수도원이었을 건물은 지금은 마을주민의 생활터전으로 변해버린 모양이지만.. 끊임없이 변하고 또 변해도.. 이 길을 걷는 사람은 천 년의 세월을 지난 지금도 계속된다.
마네루라는 마을 광장의 놀이터에서 물을 보충하고 있자니 몇몇 순례자들이 지나간다. 오늘도 어김없이 "부엔 카미노!"를 즐겁게 외친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마을 분들도 순례자들만 보면 "부엔 카미노!"로 축복해 주고 우리는 "그~라시아!"를 나름 우아하게 외쳐본다.
마네루 끝자락의 공동묘지를 지나 다시 오르막이다(요 묘지에서 간만에 노방).. 다시 땅이 제법 질다. 물이 고인 곳도 제법 보인다. 멀리서 마을이 보인다. 언덕 위의 중세풍 마을, 시라우키는 이 길만큼 아름다워 보인다.
마을 초입에는 빵을 굽는 가게가 있다. 간만에 음료수 하나 사들고 마을 정상으로 올라간다. 언제나 마을의 가장 높은 곳은 교회가 위치하고 있다. 중앙광장 아치 래 책상 위에 도장 얹어놓고 '세요(스탬프)'라고 글이 적혀있다. 크레덴시알에 세요를 찍고 걸음을 옮긴다. 마을 초입에서 만난 브라질 자전거 순례자 청년과는 진흙과 오르막 내리막이 심한 이곳에서 계속 엎치락 뒤치락이다(자전거는 오르막에서 힘들다. 여긴 경사가 급하다). 서로 힘내라고 응원해 준다.
마을 뒷편으로 내려가니 로마시대의 부서진 다리가 나온다. 다리의 중앙은 일그러져 있고, 다리 모퉁이를 디디고 걸어서 이 아름다운 마을을 벗어난다.
고속도로를 통과해 너른 벌판을 끼고 길을 걷는다. 중간에 찻길 바닥에 퍼질러서 빵과 과자를 조금 먹으면서 쉬었다. 그러다 눈 앞에 차가 지나가면 잠깐 고개를 돌렸다가 그 먼지 속에서 또 먹는다. 오랫만에 비가 거쳐 이렇게 길 위에서 쉴 수 있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한국에서라면 김여사는 절~대~로 이런 곳에 앉아 음식을 먹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순간도 너무 행복하다. 브라질의 젊은 순례자가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지나간다. 오늘은 브라질 순례자들을 많이 만난다.
숲길 좌측으로 보이던 고속도로를 멀리하고 언덕에서 내려오자 작은 마을이 나오고 머리 위로 수로가 이어져 있다. 빵 몇 조각을 먹었지만, 벌써 다리가 아파 온다. 멀리 커다란 다리가 나타난다. 중세 순례자의 다리로 로마시대부터 이어온 다리라고 한다. 차량이 다니지 못하도록 중간에 커다란 블록을 박아 놓아, 걷는 사람이 편안하게 이 길을 지날 수 있다.
햇살도 따스해 벌러덩 누워버린다. 얼마만에 만나는 햇빛인가? 뼈 속까지 따뜻해지는 느낌이다. 물소리와 따스함에 여유를 부려본다.
십 여분 뒤 강 건너편으로 짚차가 한 대 온다. 자세히 보니 경찰(산림보호대 같기도 한)차가 한 대 온다. 간만에 사진을 부탁하고 둘이 함께 사진 한 장을 찍는다.
어느새 로르카에 도착한 듯 하다. 물을 보충도 해야 하고, 김여사가 화장실도 가야겠단다. 마을 끝자락에 문을 연 듯한 가게에 가보니, 커다란 개가 자꾸만 짖어댄다. 혹시나 싶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가게라기 보다는 정육점 같다. 화장실을 부탁하니 잘 못 알아 들으신다. '바뇨', '바뇨' 처음엔 안된다고 하더니, 여자 순례자를 보더니 자신들의 집 안의 화장실을 안내해 준다. 그 사이 나는 냉장고 안에 보이는에서 산미구엘 맥주 작은 병 하나와 1.5리터 물을 하나 사들고 나와서 기다린다.
산티아고의 길에서 여자들이 조금 힘든 부분은 화장실이다. 바가 없으면 무조건 노상방뇨를 해야 한다. 화장실을 만나면 무조건 양해를 구하고라도 들어가고, 커피나 맥주를 마시면 마지막에 화장실을 들러야 안심이 된다. 남자야 뭐~~~ 세상이 모두 화장실이니까... 조금이라도 으슥한 곳에 자리라도 잡으면, 무조건 하얀 휴지조각이 보인다. 내가 찾은 소중한 장소, 다른 분들도 같은 생각으로 이미 다녀가신 것이다. 물론 덩어리는 실종이다... 내 생각에 동물들이 냠냠했을 듯 하다.
14세기 지어진 성모 승천 성당이란다. 나중에 만나게 될 산토 도밍고의 흔적이 지금부터 시작된다.
비에투르카에서 옛 흔적을 잠시 둘러보고 걸어간다. 다음 마을은 오늘의 종착 지점인 에스떼야인데.. 이 정도 걸어가면 벌써 피곤하다. 다리가 아퍼도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그냥 걸어본다.
순례자를 위해 만들어진 듯한 다리를 건너 산길을 따라 계속 걷는다.
사람의 마음이 간사한 것은 거의 다 왔다고 하는 순간부터가 가장 힘들다. 뭔가 보일 듯 보일 듯 하지만, 마음의 거리 계산과 실제 거리는 항상 다르다. 몇 마리의 말이 묶여 있고, 산 속에 길이 아름답게 펼쳐지지만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 물론 사진도 찍지 않는다. 지도 상의 3.5킬로미터가 나에게는 10킬로미터 이상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기억 속에도 전체 여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 중에 하나이다.
아침에 시속 5킬로미터가, 오후에 시속 3킬로미터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오른쪽으로 강이 계속 이어지고, 나올 거 같은 마을이 나오지는 않고, 마을 초입에 14세기 지어진 산토 세플크로 성당이 열두 사도의 모습을 간직한 채 나타난다.
한 5백미터만 가면 알베르게가 나오지만, 얼마를 더 가야 하는지 믿지 못하고 성당 앞 잔디밭에 벤치에 앉아 잠시 쉰다.
어느새 몸은 땀에 쩔고, 귀차니즘이 최대치로 발동한다.
'젠장~~ 내가 여길 왜 온거야?'
한국에서 산에 오르는 거라면, 김여사가 맛깔난 음식으로 나를 꼬셔서, 내려가서 뭐 먹자 하겠지만.. 여기야 닭, 생선, 비프로는 나를 꼬실 수도 없다.
"다 왔으니 조금 더 가자~~"
"나도 아는 데, 못 걷겠다."
"바로 요 앞이 알베르게 같은데~~~"
"가자 가자~~~ 에구, 미치겠다"
우리가 1등이다. 구석 창가에 자리를 잡고(침낭을 침대에 깔면, 요 자리 내 자리라는 표시이다. 도착하면 배낭 내리고 바로 침낭 깐다), 빨래 거리를 모은다. 1층 정원 옆으로 세탁실이 있다. 세탁기를 돌리려니 동전이 모자란다. 동전을 바꾸러 길을 따라 걸어 문 연 bar로 간다 .
세탁기를 돌리고, 김여사와 슈퍼마켓을 찾으러 간다. 앞에 우회로로 9킬로미터를 돌아 온 순례자 무리들(오스트리아 뚱땡이 할아버지들이 앞서고 뒤에 예닐곱의 사람들이 따르고 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갔다 이기고 돌아오는 사람들처럼 걸어오면서 우릴 보고 인사를 한다. 쪼금 기가 죽는다.
둘이 인포메이션 센터에 들러 인근 지역정보를 받는다. 대부분 문을 닫았다. 아까 동전 바꾼 레스토랑에 순례자 메뉴 예약을 하고 나는 알베르게로 향한다.
김여사는 빵집과 슈퍼를 찾아 마을을 홀로 절뚝거리며 돌아다닌다.
빨래를 보러 뒷뜰에 나가 맨소래담을 바르고 있자니, 문이 안에서 잠겨 버렸다. 김여사는 한참이 지나도 안 오고, 그냥 멍 때리며 아픈 다리 주무르면서 시간만 죽였다(김여사는 체력도 좋지 ㅜㅜ, 슬슬 짜증이 몰려온다.).
시간이 지날수록 순례자들이 계속 들어온다. 오스트리아에서부터 걸어온 할아버지들(그들의 뚱띠한 배가 아직도 생각난다.)이 식당으로 내려오고 그 큰 알베르게가 북적되기 시작한다.
건조기를 돌리면 정원에서 빤스만 입은 할아버지에게 한마디 한다. 'so~~ sexy!' 할아버지가 큭큭 된다.
이 날 나중에 친구가 되는 많은 순례자들이 함께한다.
예약해 둔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다. 아싸, 와이파이 잡힌다. 근데 별로 관심이 안 간다....
우리의 한계는 20킬로 정도라는 걸 체감하는 하루였다.
역사적인 마을에 도착해서 12세기의 궁전과 교회와 수도원으로 가득한 이곳에서, 산 위의 놓여진 십자가를 본 것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별의 길'이라 이름 지으며, 마을 이름까지 에스떼야라고 부른 이 아름다운 마을을 내 마음의 여유의 부족으로 그냥 지나쳤다.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무엇인가 버리고 지나치는 일들. 이런 반복에서 스스로를 조금씩 채찍질 하는 하루이다.
그래도 다리는 절라 아프다.
* 스페인에도 수맥이 흐르나? 손발이 저리고 귀마개를 해도 윗 층에서 주무시는 할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로 침대 전체가 진동해서 잠을 설친다. 12시가 넘어 어둠 속을 더듬거려 마침 비어 있는 침대 2층으로 겨우 올라간다. 막상 올라와보니 너무 높고 좁다. 양 쪽에 난간도 없다. 다시 돌아갈까하다 차렷 자세로 누워 목숨 걸고 잠을 청해 본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다행히 떨어지지 않고 살아있다.
로르카 지나서부터 힘들다. 뚠이 많이 힘들어하니까 나라도 내색하지 말고 씩씩해야 되는데 자꾸 주저앉고 싶다. 매일 바뀌는 낯선 잠자리와 공동 샤워실 등이 적응 안 되고 힘들다. 등산화 벗고 걸으면 발목은 시큰거리고 발바닥은 바늘로 찌르는 것 같다. 그래도 뭘 좀 먹어야 될 것 같아 낯선 마을을 경보선수처럼 뛰어다닌다. 스페인은 아무리 해가 이글거려도 건물 안이나 골목으로 들어오면 정말 춥다. 춥고 배고프고 피곤하고...
겨우 찾은 조그만 수퍼에서 바게뜨와 전자렌지용 음식 사고나니 돌아갈 길이 막막하다. 강 위 다리를 건너는데 햇살이 따뜻해서 잠시라도 쉬고 싶지만 서둘러 돌아간다. 허~걱! 뒷뜰에 갇혀 있던 뚠이 왜 지금 오냐고... 좀 섭했지만 안 그래도 아픈데다 추웠을 것 생각하니 내가 다 화가난다. 맛 없는 음식이지만 따뜻한 게 들어가니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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